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2세 (문단 편집) === 정책 노선 === [[파일:attachment/wilhelm_II.jpg]] [[세계 정책|그의 정책]]은 [[유럽]]을 안정시키고, 그 안정 속에서 균형자, 중재자로서 독일의 국익을 챙기는 것을 중시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는 정반대로 해외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정세의 주도권을 독점하던 [[대영제국]]에 버금가는 [[독일 제국]]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노선에 반대해 계속 진언을 했지만 빌헬름 2세는 듣지 않았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상에서 물러난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될 당시만 해도 독일 내 여론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 빼고 찬양 일색이었는데, 집권 말기 독선적인 비스마르크의 행태에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재상 비스마르크 역시 선대 [[빌헬름 1세]]와는 달리 자신을 중용해 주지 않고 사사건건 대립하는 선대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와 빌헬름 2세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는 대륙국가 독일이 높은 역량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좌우의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 제대로 한판 붙기에도 벅찬 상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주변 경쟁국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대륙국이 대양으로 나아가 해양국가 [[대영제국]]과 붙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내각 운영 방침으로 삼고 황제에게 계속 진언했다. 그러나 황제 빌헬름 2세는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아빠]]의 죽음에 책임이 컸다고 믿었던 [[대영제국|엄마의 나라]]에 미묘한 열등감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황손과 황태자 시절 19세기 후반의 눈부신 성장을 직접 보아온 그는 영국을 뛰어넘고자 비스마르크가 평생에 걸쳐 이룬 유럽의 미묘한 균형을 평생에 걸쳐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아무튼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실각([[1890년]]) 이후 팽창정책에 몰두했다. 덕분에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약간의 식민지를 얻기도 했지만, 독일의 팽창 정책에 위기를 느낀 영국이 고립을 포기하고,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의 [[삼국협상]]이 완성되어 독일은 포위당하게 된다. 해군을 육성하며 식민지를 팽창하는 정책으로 영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의 공화국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싸운 [[보어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 공화국들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는데, 이 전문은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어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말만 앞세운 것은 아니라서, 보어인들이 캐낸 금과 다이아몬드가 독일산 총포로 바뀌는 걸 본 영국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독일이 1890년대 이후 대외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평판은 악화일로를 달렸다. 결국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으로 대표되는 고립외교 노선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1902년의 [[영일동맹]]과 1904년의 [[영불협상|영불 화친조약]]으로 현실화되었다.[* 영국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가장 크게 수혜를 본 나라는 [[미국]]이다. 독일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여지껏 호시탐탐 북아메리카를 겨누던 영국의 [[대서양]] 해군 전력이 유럽으로 재편됨에 따라서, 미국은 마음 놓고 [[라틴 아메리카]]로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빌헬름 2세는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시기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 더불어 진압군을 파견함으로써, 독일 또한 제국주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전까지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독일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던 유럽의 균형은 빌헬름 2세의 이러한 대외 정책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다. 반면 외치와는 다르게 내치에서는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펴기도 했었다. 비스마르크와 본격적으로 충돌했을때가 루르 광산 파업 때였는데 이 때 비스마르크가 강경 대응을 주장하며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아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반면에 빌헬름 2세는 파업을 중재하자는 의견을 보였다.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비스마르크가 금지시킨 [[독일 사회민주당|사회주의 정당]]도 허용하고 사회 보장도 확충하고 만 13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을 금지시키고 청소년과 여성들의 노동 시간을 규제시켰으며 노동 재판소를 설치해서 노동 관련 업무를 맡기게 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위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폈고 비스마르크가 탄압에 나섰던 가톨릭 중앙당과도 어느 정도의 화합을 이루기까지 하면서 재임 초기에는 '''노동 황제'''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었다. 후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의외지만 당시 독일에서 싹트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유럽의 제국의 수장들은 대개 수많은 민족들을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고(이 부류의 끝판왕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놓고 어떤 민족을 해코지했다간 제국이 결딴날 가능성이 높았으며 국가 자체가 특정 민족의 이익이 아닌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위상이 이후의 국가들보다는 약했다. 따라서 제국의 황제들은 대개 민족들 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면이 강했다. 오히려 제국들이 붕괴된 이후 건설된 민족 중심 공화국들에 의해 소수 민족에겐 헬게이트가 열렸다.] 그렇지만 재임 중기를 넘기면서 점차 보수화되기 시작해서 자유주의 성향의 총리로 평가받는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재상 재임을 시작으로, 비스마르크급은 아니었지만 국방 예산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등등 보수적인 행보를 보였다. 재위 시절 자신의 정치 슬로건을 "Deutschland über alles(그 무엇보다 독일)"로 내밀었다. 사실 이는 독일의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의 가사 중 일부인데 여기서 슬로건을 따온 듯 하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흔히 잘 알려진 군림하는 독일이라는 잘못된 번역이 돌기 시작했다. 독일인의 노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über alles는 '그 무엇보다' 라는 뜻이지 군림한다거나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이 널리 퍼져있긴 했다.] 이 당시에 독일인의 노래가 공식 국가는 아니었지만 제2국가 수준으로 널리 볼러지던 노래였다. 아래는 빌헬름 2세의 초상과 그의 슬로건이 씌어 있는 선전 포스터. [[파일:external/static.darabanth.com/1373382.jpg]] > 정복욕은 우리를 몰아붙이지 못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선사한 영토를 수호하려는 불굴의 의지만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 Uns treibt nicht Eroberungslust, uns beseelt der unbeugsame Wille, den Platz zu bewahren, auf den Gott uns gestellt hat.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